Inuit Blogged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본문
무지개가 있습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난 저중에서 빨간색이 제일 좋아."
있을법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말합니다.
"빨간색만이 무지개의 정답이야. 주-노-초는 틀렸고, 파-남-보는 천박해."
좀 의아합니다.
요즘 책 쓰는 진입장벽이 없다시피 낮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엮을 정도의 글이면 저자가 해당 분야에 일정 부분 경륜이나 식견이 있고, 책 부피만큼의 다채로움 정도는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가끔은 기대의 배반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인문학으로 바라본 여행'이라는 컨셉은 말라가는 한국의 독자 커뮤니티에 막바로 소구하는 주요 키워드를 잘 골랐고, 좋은 조합이기도 합니다. 실제 책은 어떨까요. 그냥 책의 몇부분만 인용하겠습니다.
- "사랑을 얻으리라는 보장을 믿던 청년들은 이제 여행을 믿게 되었다."
- "저곳의 이미지에 사로잡히면 아무도 못말린다. 그를 말릴수 있는건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일곱살 아들 정도가 유일할 것"
- "'진짜 여행'에는 온갖 해방과 자유와 낭만이 집약되어 있다"
- (한심한 페르소나를 열거하며) "남편의 월급, 타는 자동차, 입은 명품, 자식의 성공으로 서로 비교할뿐"
- "(누군가) 해외 여행을 간다하면, 너 나 할것 없이 명품 사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 '현대 사회는 물질중심과 실용주의라 눈에 안보이는 교양은 취미 정도라고 생각한다"
- (이유는 설명하지 않지만) "현실중심의 사회에서 자아와 내면은 갈곳이 없다"
- "자본주의 때문에 여행이 쾌락 소비 낭비 위주로 변형되었다"
- "진지한 배낭여행객은 그 어느 때보다 오직 경험과 봄이라는 목적만을 순수하게 지니고 있기 떄문이다"
읽다가 걸리적 거리는 곳을 표시해둔 부분이 이 말고도 많습니다. 근거없는 단정과 일반화는 지적 성향이라 치고, 여성이나 아들 언급은 그냥 필터링되지 않은 얄팍함이라고 일단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책의 고갱이인 여행으로 국한해도 저자의 논리는 매우 이상합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여행이란 '자아와 내면을 탐구하는 반자본주의적 여행'을 말합니다. 복잡하게 인문학처럼 윤색했지만, 실은 저자가 초년기에 했던 105일간 유럽 배낭여행이 그 원형입니다.
한편 저자가 경멸하고 '천박하다' 표현한 여행이란게 패키지 여행과 쇼핑 여행입니다. 자본주의가 낳은 무교양, 과시욕, 자아매몰의 소비형태로 파악합니다. 이것도 실은 소시적 패키지 투어 가이드 때의 (모멸적인) 경험과, 멋진 배낭여행 중 만난 게스트 하우스 한국인들의 (환멸적) 정보교환에 근거한 일정 부류의 여행객입니다.
처음 비유처럼 '무지개의 여러 색중 난 빨간색이 좋다'는 충분히 재미난 이야기지만, 빨간색이 정답이고 나머지는 가짜라 말하기엔 세상이 그리 단순할까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여행을 통해 자아를 탐구하고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게 좋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의 생각과 제 지향은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남의 여행을 폄하할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습니다. 떠나냐 안떠나냐가 중요하지 모든 여행은 평등하니까요. 각자 편하고 행복한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면 되는거 아닐까요.
그럼 여행이란 무지개는 어떨까, 저도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들마다 불확실성에 대한 내성이 다릅니다. 또한 자극의 빈도에 대한 감수성도 다릅니다. 따라서 이 두 요소를 축으로 잡고 4분면을 만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려놓고 보니, 우리는 여행(travel)이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세분화된 영어 표현과도 상응합니다. 단기적이고 단순한 목적의 trip, 대개 정해진 일정이 있지만 다수의 목적지를 돌게되는 tour, 좀 더 장기적이고 목적보다는 여정 중심의 journey, 장기적이지만 최종적인 목표가 있는 adventure가 그 넷입니다.
이렇게 놓고 다시 생각해보면 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여행입니다. 숙박 예매는 물론, 현지가서 밥시키고 이동하는것도 버거운 사람에게 투어나 트립이 과연 나쁜 선택일까요. 그게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이며 과시적인 소비일까요. 반면 모두가 자아를 찾아 우연적이고 불확실하지만 가슴 벅찬 여정을 해야만 '인문학적으로 옳은' 경험일까요.
게다가 책에서 느껴지는 '해외여행 만이 제대로된 여행'이라는 은근한 시각은 뭘까요. 저자 스스로가 자본주의로부터 독립된 사유를 하는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되려 소외되어 선망하는듯이 느껴진다면 과한 우려일까요.
어쨌든 전 꼭 나를 찾아나서야 여행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여행은 배움 같습니다. 어떤 형태든 떠날 수 있다면 낯선 시공간에서 머무는 자체로 느끼는 점이 많을거고 그만큼 삶이 풍성해진다고 믿습니다.
Inuit Points ★☆☆☆☆
독서 모임의 책이라 끝까지 읽었지, 스스로 선택한 책이라면 1/3 지점 쯤에서 회항했을듯 합니다. 여행과 인문학을 접목했다지만 여행도 인문학도 온전치 못합니다. 여행은 편견이 강해 공감하기 어렵고, 여행 뺀 인문학은 지평이 멀지 않고 높이가 고만고만합니다. 넋두리 수필만도 못한 이유는 진솔한 자기 인식이 주는 공감마저도 세척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판되어 중고로 샀는데, 절판된 이유도 혹시 거기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서점의 서평은 칭찬일색이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덕분에 여행 4분면을 생각해볼 수 있었으니 독서시간이 죄다 낭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쇼비니스트 같은 말투는 읽는 내내 매우 피로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나가는 별점 한 개입니다. 나무야, 숲아 미안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