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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편 본문
1️⃣ 한줄 평
금강석 같은 시들, 거를 타선이 없다
♓ Inuit Points ★★★★☆
숯이 세월을 견뎌 다이아몬드가 되듯, 말도 고치고 고치면 찬란하게 빛난다는 걸 느꼈습니다.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복합적이고, 말 맛이 살면서도 글 맛도 진한 시들입니다. 꿈꾸는 듯한 언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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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작가들에게 사랑 받은 서정춘 시인은, 40편 넘는 헌정시의 대상이고, 최고 기록이라고 합니다.
- 68년에 등단하고 28년 만에 딱 한권 낸 시집이 이 죽편입니다.

서정춘, 1996
🗨️ 좀 더 자세한 이야기
서정춘의 죽편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의 강박적 과작(寡作)에서 출발하는게 좋겠네요
책에 실린 시는 35편입니다.
28년 동안 쓴, 고작 70편 중 반이나 덜어내고 그의 마음에 드는 반만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벗 신경림이 왜 이리 시를 안 내어 놓느냐 물었더니 이리 답했다고 합니다.
'(선배 시인을 예로 들며) 그 양반 천편의 시가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한편을 당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제가 함부로 시를 쓰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시는 탄소가 세월에 눌려 다이아몬드가 되듯, 철광석이 고온에 정련되어 강철이 되듯 순수하고 단단하며 찬란합니다.
읽다가 헉하고 숨이 멈춰져, 다시 읽고 또 읽은 시 한편을 옮겨 적어 봅니다.
죽편 . 1
- 여행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뭔가 평범한 말인데 더덕을 씹듯 말을 곱씹을수록 은은한 맛이 배어 나옵니다. 시인은, 종이도 없는 여관에서 첫 줄이 불현듯 생각나 벽에다 휘갈겨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는 그로부터 긴 세월 제련했다고 합니다. 4년간 80번을 넘게 고쳐쓰며 더 많은 이야기를 죄다 덜어내고 딱 다섯줄 남긴게 저 시입니다. 단어하나 줄바꿈하나까지 다 긴밀히 호응하며 그가 그렸던 심상을 풀어냅니다.
그러니 28년간 35개 시를 자아 냈겠지요.
비단 이미지의 압축 뿐 아니라, 말의 조탁도 훌륭합니다.
동행이란 시는 '물돌물 돌물돌 / 물이 흘러갑니다.'로 시작합니다. 돌 사이를 흐르는 물이 의미적으로 시각적으로 느껴지면서도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듯 적었습니다. 물돌물 돌물돌 이 여섯 글자를 조립할때까지 우주같은 세월 동안 붙이고 떼어내고 적고 발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른 시들도 그래요.
한줄평에 거를 타선이 없다고 썼듯, 과작의 서정춘이 수줍게 세상에 내어 놓은 시들은 일관되면서도 제각각 다른 매력을 뿜습니다. 몇몇 구절이 너무 좋아 인용하고 싶지만 그러다보면 몇마디 안되는 그의 시집 반은 인용할것 같아 욕심을 내려둡니다. 하지만, <30년전>, <명태>, <돌의 시간>, <봄밤비>, <갈대> 는 너무 좋으니 가능하면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시인이 있었다는걸, 이제나마 안게 다행이고 96년 시집을 몇년전 다시 복간한 출판사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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